밀정과 간첩도 그시대 그때의 교통과 통신 기술임. 현대적 기준으로 생각하면 안됨. 간첩도 사실을 알고 있을지라도 그 정보를 전달하는데 시간이 걸림. 수색과 정찰도 마찬가지. 이미 진실을 알 때는 게임 끝나고 임. 현재 진행중일 상황이 실시간으로 정보전달이 안되는 시대임. 그리고 정보차단은 기본중의 기본임. 역사서 읽어보면 전쟁중 비둘기는 보이는대로 다 죽였음. 이유는 설명안해도 알고 있을 듯.
조나라를 멸망시키기 위해 수십만을 동원한 수차례의 원정이 조나라의 저항에 막혀버리자 진시황은 큰 고민에 빠졌다. 이때 울료는 대형군사작전을 통하여 육국을 직접 타격하는 방식을 바꾸어 육국의 호신(豪臣)들을 매수해 육국을 내부로부터 붕괴시키는 방법으로 대응하자고 진시황에 건의했다.
"진(秦)은 강하고 제후(諸侯)는 비유하자면 군현(郡縣)의 군주와 같으나, 신(臣)은 다만 제후(諸侯)의 합종(合從)이 두렵고, 한꺼번에 뜻하지 않게 일어난다면 이는 곧 지백(智伯)ㆍ부차(夫差)ㆍ민왕(湣王)이 망한 이유입니다. 원컨대 대왕(大王)께서 재물을 아끼지 마시고 그 호신(豪臣)에게 뇌물을 주며 그 지모를 어지럽힌다면, 불과 30만 금(金)을 잃고 제후(諸侯)를 모두 얻을 수 있습니다."
— 울료 30만 금은 진나라 국고의 거의 전부에 달하는 것이었지만, 울료의 계략이 30만 금보다 훨씬 큰 이익을 가져올 것임을 안 진시황은 이를 받아들였고, 아예 국고를 울료에게 넘겨주어 마음껏 쓰게하고 어디에 쓰는지 묻지 않기로 했다. 그리하여 울료는 본격적으로 사람을 보내 육국의 관리들을 매수하기 시작했다.
울료의 첫 번째 목표는 한(韓)나라였다. 한(韓)나라는 삼가분진(三家分晉) 이후 상당군과 삼천군을 점거해 강한 국력으로 위세를 떨쳤지만 소후의 짧은 번영이 끝나고 곧바로 쇠락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나라는 육국중에서 가장 약한 나라였다. 오랜 기간 진나라의 동진을 막아내며 분전하였지만 한나라는 크게 쇠퇴하여 대부분의 영토를 빼앗기고 남은 영토는 수도인 신정과 옛 도성이었던 양적뿐이었다. 양적이 위치한 지역을 한나라 사람들은 남양라고 불렀다. 당시 한나라 남양의 가수(假守·임시 군수)였던 등(騰)은 출신이 불분명했다. 이름은 있지만 성이 없었다. 그는 한나라의 명문 거족출신도 세습 귀족도 아니어서 충성도가 낮았고 매수 가능성이 높았다. 울료가 매수하려는 사람들이 바로 이와 같은 사람들이었다.
진왕 정 16년, 기원전 231년 한(韓)나라의 남양태수 등이 남양땅을 통째로 들어다 진나라에 투항하는 일이 발생한다. 진나라는 한나라의 남양땅이 통째로 투항해오자 본래의 조나라를 멸하려던 계획을 바꿔 한나라를 먼저 멸하기로 결정한다. 진나라는 남양을 접수한 뒤 등을 태수로 명하고 실제로는 이곳을 전진 기지로 삼아 언제든 한나라를 공격해 멸할 만반의 준비를 마치도록 했다. 진왕 정 17년, 기원전 230년 내사(内史)로 임명된 등이 진시황의 명을 받아 10만의 진군을 이끌고 조나라를 공격하는척 하다 기습적으로 남하해 황하를 건너 한나라의 신정을 공격했다. 갑작스러운 공격이었고 설사 알았다고 해도 진군의 공격을 저지할 무력조차 없었던 한나라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진나라군은 빠르게 한나라의 수도인 신정에 다달았다.
한나라의 조야는 경악했다. 등은 오랫동안 한나라의 관리로 있었고 한나라의 내부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가 한나라 정벌의 사령관으로 온 이상 한나라가 살아남을 가능성은 낮았다. 또한 내사(内史)라는 관직은 관중의 전체 방어업무를 관장하는 진나라의 고위층이었다. 투항자인 등이 진나라에서 받는 대우를 보고 한나라의 대신들과 한왕 안(韓王安)은 자신들도 투항을 망설이게 된다. 이때, 울료는 한왕 안(韓王安)에게 서신을 보내 항복을 권유했고 후작지위의 보전을 약속한다. 진나라의 철저한 준비하에 계획된 침공이었다. 한나라는 강력한 진나라군에 의해 막다른 곳에 몰렸고, 타국의 지원은 요원해보였다. 저항이 무의미해 멸망이 단지 시간문제임이 분명했다. 조정에서의 짧은 담론이 있은 후, 한왕 안(韓王安)은 진나라에 항복하고 한나라는 멸망하게 된다.
한나라 멸망 후 한왕 안(韓王安)은 남군 영도(郢都)의 황산(荒山)에 유배됐고, 진나라는 새로운 관리를 대거 파견해 신정을 접수했다. 대다수의 한나라군은 진나라 군대로 편입되고 한나라 관리와 귀족들은 쫓겨났으며 영지도 대부분 몰수당한다. 진나라는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고스란히 한나라의 군민을 얻었지만 조야에서 철저히 배제된 한나라 귀족들의 불만은 고조되었다. 피 한방울 흘리지 않은 것은 그들도 마찬가지였고 세력도 온전했다. 후에 신정에서 한나라의 구 귀족들은 집단으로 반란을 일으키나 진압당한다.
아니...이게 실존역사야??? 진짜 저렇게만했는데 성을 내줬어??? 한나라 한번만이라도 뭔가 보여줘라 제발..ㅠㅠ 신이랑 등이 너무쉽게 이기면 재미없다...제발
답글삭제가능하지 드론이 있는 것도 아니고 ...
삭제한에 밀정이나 간첩이 있는 듯 아무리 10만 병력이 늙은이 인줄 확인도 안하고 보고 한다고??? 용산에도 밀정...
삭제가능하지... 허수아비에도 화살쏘는 마당에...
삭제먼지바람에도 군사인줄 알고 후퇴하는 마당에...
저정도면 양반이지...
밀정과 간첩도 그시대 그때의 교통과 통신 기술임.
삭제현대적 기준으로 생각하면 안됨.
간첩도 사실을 알고 있을지라도 그 정보를 전달하는데 시간이 걸림.
수색과 정찰도 마찬가지.
이미 진실을 알 때는 게임 끝나고 임.
현재 진행중일 상황이 실시간으로 정보전달이 안되는 시대임.
그리고 정보차단은 기본중의 기본임.
역사서 읽어보면 전쟁중 비둘기는 보이는대로 다 죽였음.
이유는 설명안해도 알고 있을 듯.
무혈개성.....몽무나 양단화가 올 줄 알았는데....등이 독자도 속였네..한이 도망 갈만도
답글삭제아 환기가 사라지니까 전투신도 평범해지고 조용조용해지네...진심으로 신의 병럭이든 등의 벙력이든 1만정도는 썰려나갔으면 좋겠다...투지라도 보여야지 이건뭐 그냥 나라넘겨줄 분위기네 그냥...아니 1만보단 크게 3만정도는 쓸어야지...뭔가 이번전쟁은 너무 조용하다...
답글삭제애들아 한나라는 작은 나라여 그걸 생각좀 하고 말을 해라 한나라는 매번 저리 방어를 햇기 때문에 이번에도 저리 한거고 멀리서 보면 노인인지 뭔지 어떻게 아냐?? 흙먼지 보고 놀란거지 10만이라고 숫자 쌔는것도 아니고 대충 10만정도 되겟다 햇겟지
답글삭제저런내용 사기에는 없을텐데 각색인듯
답글삭제처음부터 각색이었는데,
삭제원래부터 각색이었고,
지금도 각색임.
처음부터 끝까지 각색아닌게 없음.
그리고 사기에 적혔다고 그것도 진실도 아님.
사마천이 직접보고 쓴 것도 아니고, 직접 보고 썻을지라도 자기 주관이 들어가게 되어 있음.
이미 사마천이 사기를 쓴 것 그 자체도 각색이 무조건 들어가게 되어있음.
그러니 각색을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지...
한나라 멸망
삭제조나라를 멸망시키기 위해 수십만을 동원한 수차례의 원정이 조나라의 저항에 막혀버리자 진시황은 큰 고민에 빠졌다. 이때 울료는 대형군사작전을 통하여 육국을 직접 타격하는 방식을 바꾸어 육국의 호신(豪臣)들을 매수해 육국을 내부로부터 붕괴시키는 방법으로 대응하자고 진시황에 건의했다.
"진(秦)은 강하고 제후(諸侯)는 비유하자면 군현(郡縣)의 군주와 같으나, 신(臣)은 다만 제후(諸侯)의 합종(合從)이 두렵고, 한꺼번에 뜻하지 않게 일어난다면 이는 곧 지백(智伯)ㆍ부차(夫差)ㆍ민왕(湣王)이 망한 이유입니다. 원컨대 대왕(大王)께서 재물을 아끼지 마시고 그 호신(豪臣)에게 뇌물을 주며 그 지모를 어지럽힌다면, 불과 30만 금(金)을 잃고 제후(諸侯)를 모두 얻을 수 있습니다."
— 울료
30만 금은 진나라 국고의 거의 전부에 달하는 것이었지만, 울료의 계략이 30만 금보다 훨씬 큰 이익을 가져올 것임을 안 진시황은 이를 받아들였고, 아예 국고를 울료에게 넘겨주어 마음껏 쓰게하고 어디에 쓰는지 묻지 않기로 했다. 그리하여 울료는 본격적으로 사람을 보내 육국의 관리들을 매수하기 시작했다.
울료의 첫 번째 목표는 한(韓)나라였다. 한(韓)나라는 삼가분진(三家分晉) 이후 상당군과 삼천군을 점거해 강한 국력으로 위세를 떨쳤지만 소후의 짧은 번영이 끝나고 곧바로 쇠락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나라는 육국중에서 가장 약한 나라였다. 오랜 기간 진나라의 동진을 막아내며 분전하였지만 한나라는 크게 쇠퇴하여 대부분의 영토를 빼앗기고 남은 영토는 수도인 신정과 옛 도성이었던 양적뿐이었다. 양적이 위치한 지역을 한나라 사람들은 남양라고 불렀다. 당시 한나라 남양의 가수(假守·임시 군수)였던 등(騰)은 출신이 불분명했다. 이름은 있지만 성이 없었다. 그는 한나라의 명문 거족출신도 세습 귀족도 아니어서 충성도가 낮았고 매수 가능성이 높았다. 울료가 매수하려는 사람들이 바로 이와 같은 사람들이었다.
진왕 정 16년, 기원전 231년 한(韓)나라의 남양태수 등이 남양땅을 통째로 들어다 진나라에 투항하는 일이 발생한다. 진나라는 한나라의 남양땅이 통째로 투항해오자 본래의 조나라를 멸하려던 계획을 바꿔 한나라를 먼저 멸하기로 결정한다. 진나라는 남양을 접수한 뒤 등을 태수로 명하고 실제로는 이곳을 전진 기지로 삼아 언제든 한나라를 공격해 멸할 만반의 준비를 마치도록 했다. 진왕 정 17년, 기원전 230년 내사(内史)로 임명된 등이 진시황의 명을 받아 10만의 진군을 이끌고 조나라를 공격하는척 하다 기습적으로 남하해 황하를 건너 한나라의 신정을 공격했다. 갑작스러운 공격이었고 설사 알았다고 해도 진군의 공격을 저지할 무력조차 없었던 한나라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진나라군은 빠르게 한나라의 수도인 신정에 다달았다.
한나라의 조야는 경악했다. 등은 오랫동안 한나라의 관리로 있었고 한나라의 내부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가 한나라 정벌의 사령관으로 온 이상 한나라가 살아남을 가능성은 낮았다. 또한 내사(内史)라는 관직은 관중의 전체 방어업무를 관장하는 진나라의 고위층이었다. 투항자인 등이 진나라에서 받는 대우를 보고 한나라의 대신들과 한왕 안(韓王安)은 자신들도 투항을 망설이게 된다. 이때, 울료는 한왕 안(韓王安)에게 서신을 보내 항복을 권유했고 후작지위의 보전을 약속한다. 진나라의 철저한 준비하에 계획된 침공이었다. 한나라는 강력한 진나라군에 의해 막다른 곳에 몰렸고, 타국의 지원은 요원해보였다. 저항이 무의미해 멸망이 단지 시간문제임이 분명했다. 조정에서의 짧은 담론이 있은 후, 한왕 안(韓王安)은 진나라에 항복하고 한나라는 멸망하게 된다.
한나라 멸망 후 한왕 안(韓王安)은 남군 영도(郢都)의 황산(荒山)에 유배됐고, 진나라는 새로운 관리를 대거 파견해 신정을 접수했다. 대다수의 한나라군은 진나라 군대로 편입되고 한나라 관리와 귀족들은 쫓겨났으며 영지도 대부분 몰수당한다. 진나라는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고스란히 한나라의 군민을 얻었지만 조야에서 철저히 배제된 한나라 귀족들의 불만은 고조되었다. 피 한방울 흘리지 않은 것은 그들도 마찬가지였고 세력도 온전했다. 후에 신정에서 한나라의 구 귀족들은 집단으로 반란을 일으키나 진압당한다.
각색해야지... 실제 역사는 그냥 한나라가 피 한방울 안흘리고 멸망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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