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몇 년이 지난 일이다. 어느 지방 종합병원에 파견을 나가 있는데
어느 날 응급실로 피투성이가 된 환자가 실려 왔다.
그는 늘 다니던 산으로 등산을 하던 중에 그를 멧돼지로 오인한 사냥꾼의 총격을 받아
온몸에 산탄이 박혔던 것이다.
수십 발의 탄환은 그의 배와 가슴을 뚫고 후복벽과 신장, 폐 등에 박혔고,
탄환이 지나간 자리에서는 압박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양의 출혈이 계속되었다.
이럴 때는 뒤돌아볼 것도 없이 환자를 대학병원으로 옮겨야 한다.
괜히 어설프게 치료하면서 시간을 끌면 회생가능성만 낮아지기 때문이다.
나는 환자의 양팔에 급히 수액을 달고 응급약을 투여한 후 수혈을 시작하면서 앰블런스로 환자를 옮겼다.
환자의 상황이 워낙 급박해서 나도 외래를 비워둔 채 앰블런스 옆자리에 탔고
파견 나온 인턴 선생은 환자 가족과 함께 뒷자리에 탔다. 그리고 앰블런스 안에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병원에 준비되어 있던 피라는 피는 모두 실어놓았다.
대학병원으로 가면서 나는 뒷자리에 있던 인턴 선생에게
10분마다 환자의 혈압과 맥박을 체크하고 혈액팩이 비면 새로운 수혈액으로 교체할 것을 지시했다.
그런데 대학병원에 전화를 걸어 환자의 상태를 설명하고 집도를 부탁할 스태프를 수배하느라 정신이 없는데
뒷자리의 보호자가 “이렇게 피가 안 들어가도 괜찮아요?” 하고 인턴 선생에게 질문하는 소리가 얼핏 들렸다.
무슨 소린가 해서 뒤를 돌아보니,
환자의 양팔에 달린 혈액팩이 비었는데도 인턴 선생이 교체를 하지 않고 있었다.
“뭐해! 빨리 혈액 교체하지 않고!”
인턴 선생에게 큰소리로 고함을 질렀지만, 요란한 경광등 소리 때문인지 인턴 선생은 계속 링거액만 바꾸고 있었다.
나는 할 수 없이 고속도로 갓길에 차를 세운 뒤 뒷자리의 문을 열고 환자가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여자 인턴 선생은 당황한 때문인지 두 눈에 닭똥 같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혈액이 들어가야 할 주사관으로 계속 링거액만 주입하고 있었다.
나는 일단 급한 마음에 인턴 선생을 옆으로 밀어내고 수액병을 얼른 혈액팩으로 교체하고
대학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직접 환자 옆을 지켰다.
산탄에 맞은 자리에서 계속 피하 흘러내려 이미 피바다가 되어버린 앰블런스 안의 모습이
어린 여자 인턴 선생에게는 감당하기 힘들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출혈하는 만큼 수혈이 이루어졌고, 미리 연락을 받은 대학에서는
우리가 도착할 때쯤 이미 수술준비까지 끝내고 있었기 때문에 다행히 환자의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나는 환자가 수술실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후배들이 있는 의사휴게실에 잠시 들러
앰블런스 안에서 인턴 선생이 패닉 상태에 빠져서 수혈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바람에
위험할 뻔했다는 얘기를 했다.
그러자 후배 하나가 아주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이렇게 말했다.
“형……그친구 XXX의 증인 신도예요.”
나는 순간 머리가 아득해졌다.
환자의 혈관에 대신 흘러들어가고 있던 식염수가 생각났고,
수혈관을 잡고 우물쭈물하면서 눈물을 흘리던 인턴 선생의 얼굴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 순간에도 남편의 손을 잡고 간절히 회생을 기도하던 환자 아내의 얼굴이 겹쳐졌다.
나는 그날 태어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여자의 뺨에 손을 댔다.
물론 아무리 급박한 상황이라 하더라도 여자 후배에게 손찌검을 한 행위가 정당한 일일 수는 없었다.
그러나 내가 빼앗아 든 인턴 선생의 수첩에는 ‘NO BLOOD. NO TRANSFUSION!' 이라는 글씨가 커다랗게 씌어 있었다.
출처 https://blog.naver.com/donodonsu/100010397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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